Seasonal Moment


어제는 안좋은 몸을 끌고 걸어서 우체국에 갔다 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약을 먹은 후 '아, 소포 찾으러 가야지' 후드 스웨터를 뒤집어 쓰고 비틀비틀 집을 나선 것이다. 우체국은 딕슨과 이슬링턴의 교차로에 있었고 우리집에서 걸어 오가자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햇빛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한 날이었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평일, 동네의 이른 오후. 고등학교의 운동장에서는 스무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한쪽은 붉은띠를, 한쪽은 노랑띠를 허리에 매고 선생님의 주도로 무언가 경기를 시작하려는 참이었고, 잔디로 되어있는 운동장 한편에 온통 피어있는 민들레들과, 테니스 코트를 둘러싼 철책에 누군가 매어놓은 자전거가 눈에 띄었다. 꽤 어중간한 시간인데 시간을 때우는지 학교 근처엔 교복을 입고 가방을 맨채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이 많았다. 이제 지나친 운동장에서 여자애들 외치는 소리, 멀고 커다란 하늘에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평일오후'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대한 적막함의 표면을 긁듯이 가끔씩 끼어들거나 하고 있었다.

버스가 한 대 다가와 서더니 할아버지 한 사람이 내려서고, 몇 사람 타지 않은 버스는 잠시 나를 위해 정차해있는 듯 하다가 내가 운전사와 마주친 시선을 피하자 출발했다. 햇빛을 잔뜩 받아 빛나던 텅 빈 버스가 지나가자 그 자리는 한결 더 환하고 한결 더 비어있고, 주위는 갑자기 조용해져 차라리 머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도 괜찮은걸까.

나는 니체의 '내 누이와 나'를 들고 있었는데, 니체에게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그가 뭐라고 말하건 그저 그랬다는 느낌으로, 확실히 이 사상가가 미쳤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가운데 혹시 건질 것이 있나 없나 폐품함을 뒤적이는 기분이었다. 프러시아 백작부인과의 관계가 어땠다느니, 누이와의 관계를 숙모는 알고 있었다느니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냥 책을 집어 치우고 싶었지만 나는 우체국에 가는 중이었고 마땅히 책을 집어 치울 장소가 없었다.
실은 내 자신의 증상이 감기인지 알러지인지 잘 구별이 안가서 감기, 독감용의 네오 시트런(Neo Citron)과 베니드릴을 같이 먹었는데, 양쪽 다 잠이 오게 하는 성분이 들어있었고 덕분에 쏟아지는 수마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길고 완만하게 올라가는 주택가의 언덕길을 눈을 뜬 시간보다 감은 시간을 길게 하며 흐느적거리며 걸어갔다.

블록버스터 비디오가게가 있는 작은 상점가를 지나 공동묘지의 철 울타리를 손가락으로 느끼고, 1930년에 태어나서 넉달만에 죽은 한 아기의 묘비에, '우리들의 아들 스티븐을 추모하며' 쓰인 것이라든가, 그 옆에 그 부모들, 형 오빠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죽은 동생들이 무리지어 묻혀 있는 것도 보았다.

by 준치군 | 2007/05/16 04:37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vivaldi.egloos.com/tb/156753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